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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미묘

“크기가 똑같은 숟가락” from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S3E07

오늘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다뤄 볼까 한다(아직 이번 주 마감이 줄줄이 남아 있어서 당분간은 계속 ‘크엑걸’ 재탕이 이어질 예정).

원래는 폴라가 변호사를 준비하면서 자기는 “넌 커서 애나 줄줄이 낳지, 큰일은 못해.” 이런 얘기를 들으며 자라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을 하는 장면 가지고 breeder와 leader의 운율을 번역으로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해 보려고 했는데, 아직 ‘크엑걸’ 전체 회차 및 대사가 머릿속에 제대로 이식이 안 돼서 회차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길래 못지 않게 좋아하는 다른 회차를 골랐다(모든 장면과 대사가 세세하게 떠오를 때까지 혹은 그 과정이 질려서 그만 보고 싶어질 때까지 계속 볼 예정).

삑! 맥락 타임🕰
레베카는 상담 숙제로 “뭐든 너무 열성적으로 하지 말고 C+쯤으로 살기”를 받고 마침 혼자 있는 거동 불편한 아버지를 며칠 보러 가는 폴라를 따라 폴라의 본가 버펄로에 간다. 이 드라마 전반에서 폴라와 레베카의 일방향적 유사 모녀 관계가 다뤄지는데(이를 주변 인물을 통해 지나가듯 꾸준히 짚어 주는 빌드업이 참 좋다), 이 회차에서 마침내 둘은 대등하게 서로 의지하고 의지받는 친구 관계로 거듭나기로 한다.

You know what size spoons fit together the best?
어떤 숟가락끼리
가장 잘 포개지는지 알아요?

해석에서 “what size”를 뺐는데 한국어에서는 이게 더 감정을 자연스럽게 잘 전해 주는 것 같다.

Same-sized spoons.
크기가 똑같은 숟가락이요.

이 말이 너무 좋아서 처음 이 장면 보고 “Same-sized spoons”를 블로그 제목으로 쓴 적이 있었다. 그 블로그는 금세 그만뒀지만.

글자 수로만 따지면 “똑같은” 대신 “같은”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인데, 그러면 뭔가 이 대사가 전하는 감정이 살짝 밋밋해지는 것 같아서 굳이 “똑같은”을 썼다.

영어에서 숟가락은 “포옹”을 은유하는 아주 포근한 단어인데, 잘 때 서로 같은 방향으로 껴안는 자세도 “스푸닝spooning”이라고 한다. 내가 ‘크엑걸’ 못지 않게 좋아하는 드라마 ‘플리즈 라이크 미’에서도 “큰 숟가락이 좋아, 작은 숟가락이 좋아?”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키 큰 사람이 뒤에서 안는 자세와 키 작은 사람이 뒤에서 감싸안는 자세 중 뭐가 더 좋냐고 묻는 말이다.

스푼의 또 다른 용례로,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금수저/흙수저”처럼 “a silver spoon”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에서 요즘은 이 말이 폭발적으로 널리 쓰이다 보니 아예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지만, 영어에서는 예전 한국어 용례처럼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정도의 어감으로 쓴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은수저보다는 ‘snob’을 써서 보통 빈정거리는 느낌이 더 잦다고 느낀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번역할 때, 스푼으로 쓸까, 숟가락으로 쓸까, 수저로 써야 하나를 왠지 매번 고민하게 되는데, 일단 수저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합쳐 부르는 말이라서 제외하고, 스푼—숟가락 사이를 고민하다 결국 숟가락을 택하게 되는 것 같다.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 내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서.

앞으로도 계속 꾸준히 ‘숟가락’과 친해지면서 ‘spoon’과 ‘숟가락’ 사이의 문화적 거리를 찬찬히 좀 메워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