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유명한 작가가, 또 다른 유명한 다른 문화권 출신 작가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영어 어법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뭐든 자유롭게 글을 더 많이 써 봐라.”
이 말이 어찌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지, 이 카테고리에서도 언젠가 한 번 써먹었던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이 정도로 기시감이 선명한 것을 보면 잠깐만 뒤져 보면 이 말을 인용한 포스트가 금세 나올 것 같다. 전에는 누가 누구한테 한 말인지도 다 기억했는데, 어느 새 이름은 전부 다 잊어 버렸다.

You can tell yourself whatever,
네가 속으로야 뭐라고 생각하건
오늘 소개할 ‘크엑걸’의 이 대사를 보면, 위의 조언을 한 작가(언뜻 영어권 출신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의 말이 어떤 뜻인지 조금은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주로 이 카테고리에 소개하는 것도 거의 다 비슷한 결의 대사들인데, 저 위 대사를 표면적으로 해석하자면, “네가 네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건”이라는 뜻이 된다.
“자신에게 말하다” 같은 표현은 지극히 영어적인 말투다. 한국어로 이런 말을 구사하는 사람은 보편적이지 않으니까. 나한테 말한다고? 이게 무슨 뜻일까… 아, 속마음이라는 뜻이겠구나, 뭐 대강 이런 과정을 거쳐 저 대사를 해석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야말로 직역하듯이 한국어 사고를 영어로 옮기다 보면, 아마 마찬가지로 영어권 화자가 읽기에 어색한 한국어식 문장이 많이 만들어질 거다. 위의 작가는 아마 이런 딱히 어느 언어에도 매끄럽게 달라붙지 못하고 그사이를 부유하는 문장을 많이 써 보라는 조언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개한 예시와 비슷하게, 미드에서 진짜 많이 등장하는 대사 중에 “I told myself outloud.” 같은 식의 말투가 있는데, 이것도 나 자신에게 소리 내 말했다는 뜻이지만, 맥락에 따라서 ‘내 속마음이 확신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거나 아니면 나를 꾸짖고 자책하는 목소리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건 좀 문화 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한국어권에선 속으로 생각했다/내심 내 마음이 그랬어, 뭐 그런 식으로 표현할 것들을 영어권에서는 또 좀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게 통용화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생각을 또 해 본다. 문화 차이야 있어도, 그 문화를 형성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에는 별 차이가 없지 않나, 하고. 그래서 그냥 이런 대사를 만났을 때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말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게 해당 인물의 감정선과 어느 정도 잘 맞아 떨어진다 싶으면, 그 말을 해당 영어 표현의 번역 문장으로 점찍는 것이 내가 요즘 활용하는 번역 방식이다(물론 일할 때는 먼저 구글링부터 해 본 다음 대사를 습득하기는 한다).
뒤늦게 맥락 타임🕰
조시는 발렌시아와 헤어진 이후 레베카의 집을 에어비앤비 숙소처럼 이용하면서 저녁 때는 늘 혼자만의 약속으로 바쁘다. 연락두절이던 그렉의 상황을 알아낸 레베카는 그렉과 서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모든 상황이 대강 정리가 된 저녁, 마침내 레베카는 그렉과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일방적으로 조시 기분을 맞추기에 급급하던 자신을 돌아보고, 드디어 차분하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내가 그동안 게임이나 탁구 같은 걸 좋아하고 잘하는 척했던 건 그냥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나한테 좀 더 예의를 갖춰 달라고.
위 대사는 이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한다. 이제 ‘크엑걸’ 9바퀴째 돌고 있는데, 10번째에 대본 공부 한번 하면서 보고, 한참 묵혀 놨다가 다시 볼까 싶다. 이렇게 계속 봐도 재밌다니 참 신기한 드라마다. 어제는 나 혼자 뒷북으로 ‘크엑걸’ 다큐를 뒤늦게 보고 또 약간 뭉클하게 벅차오르는 새벽을 보냈다. 대 천재 레이철 블룸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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