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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미묘

“임신 9개월” from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점점 “놀면서 본 영화”라는 이름에서 주제가 벗어나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최근에 끝낸 로마 유적 다큐멘터리에서 폼페이를 잿더미에 묻혀 멸망하게 만든 베수비어스산의 화산 폭발을 제법 자세히 다뤘는데 거기에 임신 상태로 발견된 유골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희생자는 임신 7개월 임산부였는데, 근처에 조그만 유골(아기)이 함께 발견되었다. 예전 같으면 이걸 그냥 원문대로 한국어자막에도 “임신 7개월”로 썼을 텐데, 그냥 갑자기 ‘크엑걸’에서 헤더가 외치던 “9달 임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왜 미국인의 임신은 9개월이고, 한국인의 임신은 10개월일까?

처음에는 어쭙잖은 지식으로, 우리는 마지막 월경 기준으로 임신 기간을 재니까, 뭔가 태어나자마자 1살이 되는 것과 비슷하게 한 달쯤 뭔가 더 미리 기간을 재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이걸 “임신 8개월”로 옮기고, 비고에 대강 한국은 만삭이 10개월이라서 서구권과 다르다는 내용을 남겼다.

원래 그 둘이 왜 다른지를 애초에 제대로 알아 보고 작업해야 하는데, 그냥 나의 직감(객기?)을 믿고 “8개월”로 납품했다가 이제야 뒷북으로 이유를 찾아 보았다. 미국이나 우리나 임신 기간은 280일로 잡는다. 그리고 임신 기준 날짜도 똑같이 마지막 정혈 첫째날이다. 그럼 대체 뭐가 다르길래 재는 시스템이 다를까?

정답은, 한국은 임신 기간을 한 달 = 4주로 계산한다. 그런데 미국은 한 달 = 30일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임신 기간은 4*7 = 28 = 한 달. 280/28 = 10개월이다. 그리고 미국은 280/30 = 9개월 ••• 10일이다. 한 달 차이라고 생각하면 긴데, 실제로는 9개월 + 며칠을 뭉뚱그려 9월이라 부르는 거라서 어감과 달리 기간은 똑같다.

그렇다면 이제 영미권식 임신 7개월을 한국식으로 계산해 보자. 7*30 = 210일, 210/28 = 7.5 = 대강 8개월차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게 이야기 흐름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번역에 세세한 힘을 주는 기분이 제법 재밌다.

이거 쓰는 동안 휴대폰을 몇 번이나 떨어뜨리면서 졸았다. 오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기도 했고, 애초에 마감 끝내고 거의 아침에 자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자자….